[TK저널] #지례이야기
자식없이 돌아가신 스승(장지도)의 묘소에서 제자(윤은보,서즐)들이
3년간이나 시묘(侍墓)살이를 한다는 것은 현대적인 효(孝)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2년전 정려각을 둘러보는 이명기시의원)
하지만 600년전의 이곳 지례현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삼선생 유허비와 정려각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예를 아는 고장이라는 뜻인 지례(知禮)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니까요.
아래는 창살속에 갖혀 있던 삼선생 정려각을 밝은 곳으로 끄집어낸 이야기를 적어 보겠습니다.
이곳 김천시 지례면(知禮面)은 조선의 윤리·도덕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린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랍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예로
스승을 모신 윤은보와 서즐이 그들이지요.
지례를 한자 뜻대로 풀이하면 ‘예절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김천 향토사학계 일부에서는 ‘지례(知禮)’라는 지명이 삼강행실도 발행 이후 붙여졌다는 설이 있지만 ‘지례’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기는 합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지례현은 원래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명칭으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설명 드리면 1434년 조선 4대 왕 세종(世宗,1397~ 1450)의 명으로 제작된 일종의 ‘국민윤리 교과서’입니다.
집현전 학자 설순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에 기록된 충신·효자·열녀의 모범적 행동을 한글과 한자로 정리했지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유명한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安堅)의 그림이 더해진 삼강행실도는 글을 모르는 백성에게도 유교적 도덕률을 전파하는 최적의 수단이었습니다.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편찬하기로 마음먹은 때는 1428년(세종 10)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진주 사람 김화(金禾)에 대한 보고를 받은 직후였다고 합니다.
당시 조정 중신들은 엄격한 처벌로 백성을 다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고 합니다. 처벌보다는 교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후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편찬해 도덕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했답니다.
또한 개국초기 어수선한 정국을 간신히 수습한 상황에서 유교적 통치이념의 보급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기도 했구요.
이와 함께 삼강행실도를 통해 한글을 널리 보급하려는 세종의 의중도 담겨 있었겠지요. 그 당시 삼강행실도는 천자문 다음으로 많이 발행된 ‘베스트셀러’였고, 책 안에 수록된 인물들은 일약 조선의 ‘슈퍼스타’로 떠올랐답니다.
삼강행실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개인과 가문은 물론 해당 인물을 배출한 지역에도 경사스러운 일이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삼강행실도에 소개된 충신112명, 효자 110명, 열녀 94명 중 우리나라의 사례는 16편에 불과했으니까요.
충신과 열녀에 대한 스토리가 각각 6편씩이고, 효자와 관련된 스토리는 4편인데, 그중에서도 부모가 아닌 스승을 모신 효자는 지금의 김천지역인 지례현 출신의 윤은보(尹殷保)·서즐(徐騭)의 사례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삼강행실도' 발행 이후 지례현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는 고장으로 변했고, 조선의 300여 고을 중에서도 조그마한 산골 현읍(縣邑)에 불과했지만 주민들의 자부심 또 한 한껏 드높았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이 “오륜과 삼강이 제대로 갖춰진 곳은 영남뿐이다”라고 밝힌 배경에도 예를 중시하는 지례현 사람들의 품성이 한몫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했겠지요.
“낳은 분은 부모지만,
사람답게 길러주신 분은 선생님이다”
군사부일체의 예로 스승을 모신 지례현의 윤은보·서즐 이야기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 공민왕 20년(1371),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 1371~?)가 지례현에서 태어났답니다. 훗날 장성하여 문과에 급제한 반곡은 조선건국에 참여할 정도로 학문적 깊이가 뛰어났구요.
반곡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당 태종의 정치이야기를 담은 치세서(治世書)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쳐쓰는 등 갓 개국한 조선의 안정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초의 정치적 혼란에 환멸을 느낀 반곡은 얼마 못 가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인 지례현으로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주력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반곡은 지례현을 중심으로 향토학계에 선구자적인 문풍(文風)을 일으키고 도의심(道義心)을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했지요. 반곡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니 제자들은 자식이나 매한가지였겠지요?
반곡선생이 후사가 없는 탓도 있겠지만, 지례현의 제자들도 스승을 극진히 모셨구요. 그중에서도 윤은보와 서즐이 유달리 반곡을 따랐는데, 두 제자는 “우리를 낳은 분은 부모지만, 우리를 사람답게 길러주신 분은 스승님이시다.
아들 없는 선생님을 우리가 모시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라며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부자관계와 동일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극진한 봉양에도 스승인 '반곡'은 세상을 하직했고, 슬픔에 잠겼던 윤은보와 서즐은 부모에게 허락을 받은 후 친아들처럼 스승의 시묘살이를 자청했다고 합니다.
윤은보는 스승의 시묘살이 도중 부친상까지 당하지만 스승과 부친의 묘소를 번갈아 찾아가며 예를 다 했고
서즐 역시 스승을 위한 시묘살이에 정성을 다 했는데, 한겨울 스승의 제삿상에 고기를 올리지 못한 서즐이 흐느껴 울자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서즐은 부모상을 당해 총 9년간의 시묘살이를 견뎌냈는데, 고을 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세종은 윤은보와 서즐의 효성에 감탄, 1432년(세종14)
두 사람에게 벼슬과 정려(旌閭, 마을에 정문을 세워 효자나 열녀를 기리는 일)를 내렸다고 합니다.
정려각의 안을 들여다 보면....
왼편에는
‘절효위사후릉참봉윤은보문
(節孝爲師厚陵參奉尹殷保門)’이, 오른편에는
‘절효위사사연서즐지문
(節孝爲師司涓徐騭之門)’이란
정판이 걸려 있습니다.
또 정려각의 왼쪽을 보면 삼강행실도에 오른 반곡 장지도와 윤은보·서즐을 기리는 삼선생유허비(三先生遺墟碑)가 있지요.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석은 중국 (그 당시는 청나라)저장성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집니다.
(삼선생 정려각 정비사업 추진위원회)
이만하면 창살에 갖힌 삼선생 정려각을 다시 밖으로 끄집어 내고 홍살문을 세울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